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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번째 편지 - 오늘 별일 없으면 저하고 식사하시지요.

 

고등학교 동창 8명으로 구성된 모임이 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 모임입니다. 가족들끼리도 잘 알고 서로 친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해 놓은 모임 일자는 없지만 대략 한두 달에 한 번은 만났습니다. 핸드폰 밴드도 만들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이 한 삼 개월 정도 뜸했습니다. 정확하게는 5월 27일 부부동반으로 만나고 연락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여름이니까 휴가들 간 거겠지.' 밴드에 외국 여행한 사진이 올라오고 있어 제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례적으로 만나던 주기에 비하면 간격이 너무 긴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제가 만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제가 모시겠다는 말도 넣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각자 사정이 있어 많이 모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느 친구는 너무 바빴는지 답장도 없습니다. 결국 9월 6일 네 명이 만났습니다. 반쪽짜리가 된 모임을 마주하고 서로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입니다. 속상함도 발산하고 성토도 해댑니다. 그러나 '서로 자주 만나자'는 말로 끝이 났습니다.

저는 세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진짜 친한 친구일까?" 그중에는 고등학교 3년간 같은 반이었고 2년을 짝을 했고 사법시험도 같은 해 합격하여 연수원을 2년간 같이 다닌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그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기고 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제일 친한 친구일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였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제일 친한 친구인 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 친구를 개인적으로 1대 1로 만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릅니다. 모임에서 서로 만나고 있을 뿐이지요. 그가 가진 고민을 제가 알까요? 제가 망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친구관계가 이렇게 되어 가고 있을까요. 저에게 과연 친한 친구란 무엇을 의미하고 누가 있을까요.

사회학자들은 연구결과 친한 친구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접근성, 둘째 지속적인 만남, 셋째 계획하지 않은 교류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다 충족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접근성만 놓고 보면 제일 접근성이 높은 사람은 직장 동료입니다. 그러나 직장동료가 친한 친구로 발전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평검사 시절에는 동료 검사들과 가까웠습니다. 늘 옆에 있었습니다. 늘 같이 술을 먹었습니다. 늘 같이 고민하였습니다. 고민의 주제가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점점 승진을 하자 동료 검사는 친구에서 경쟁자로 변해갔습니다. 마지막에는 한자리를 놓고 몇 명의 동료들이 경쟁을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친한 친구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는 그저 옛 동료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서른 이후에는 새로운 친한 친구를 만들기 어렵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접근성 이슈는 학창시절 친한 친구에게도 타격을 줍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학창시절 친한 친구를 만날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회적 지위와 소득이 친한 친구 간의 접근성을 방해하고 말지요. 동창회에 갔다 오면 기분 나빠지는 것은 여자뿐만 아닐 것입니다. 성공이라는 것을 위해 우정을 통해 얻는 추상적 행복감은 얼마든지 희생할 용의가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성취하였건 성취하지 못하였던 육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후회되는 것은, 왜 그리도 많았던 우정을 성공 때문에 버려야만 했는가입니다.

지속적인 만남은 접근성의 문제와 중첩되는 것 같지만 좀 다른 문제입니다. 접근성이 높으면 당연히 지속적인 만남이 많아질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는 접근성도 높았고 지속적인 만남도 당연히 많았습니다. 노력이라는 것이 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밖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났습니다. 당연히 고운 정 미운 정이 들어 우정이 켜켜이 쌓여 갑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지속적인 만남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의지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던 시절과는 달리 누군가 연락을 하여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락을 한두 번 하다 보면 상대방의 반응과 성의를 직감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요즘 같으면 카톡을 보냈는데 답신이 늦으면 섭섭해지고 만나서 상처 주는 이야기를 하면 배신감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쌓이면 지속적인 만남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지속적인 만남을 자동화 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각종 월례 정기 모임을 만드는 것이지요. 초월회(첫 번째 월요일 만나는 모임), 두목회(두 번째 목요일 만나는 모임), 막금회(마지막 금요일 만나는 모임) 등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이 네 명짜리이건 20명짜리이건 그런 모임에서 진정한 우정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우정, 친한 친구가 되려면 세 번째 계획하지 않은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퇴근 시간에 전화를 걸어 "오늘 비가 오는데 우리 소주 한잔 할까"하는 이야기를 건넬 용기가 그에게 친한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직장 동료들 사이에는 이런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 점점 줄다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회사 부장인 친구가 고교시절 친한 친구였던 어느 장관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오늘 첫눈이 내리는데 우리 전망 좋은 곳에 가서 저녁이나 하면서 옛날이야기할까?"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상상이 되시나요? 저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우정의 세상입니다. 회사 부장과 장관은 그들이 가진 직업에 불과합니다. 그의 참모습은 아니지요. 언젠가는 벗을 옷인데도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피부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퇴근 후에도 그 옷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평생 한 번도 계획하지 않은 교류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사람 간의 약속은 항상 어떤 의식이었습니다. 미리 일정한 시간을 두고 예의를 갖추어 약속 날짜를 제안하고 약속 장소도 격조 있는 것을 선택하고 참석자도 주도면밀하게 짭니다.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시간이 빌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여 오늘 나랑 같이 저녁 먹자는 제안을 하지 못합니다. 저로서는 학습되지 않은 불편함이니까요?

학창시절 동창이건, 직장 동료이건, 사회 친구이건 그들을 자신의 친한 친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접근성, 지속적인 만남, 계획하지 않은 교류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회의가 듭니다. 그러나 노력해 보렵니다. 지금 그래도 활동을 할 때, 이런 노력을 기울여야 과거의 친한 친구 중 몇몇을 현재의 친한 친구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의 그 많은 지인을 미래의 친한 친구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결정짓는 것은 지적인 뛰어남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이다."라는 [행복의 조건]을 쓴 조지 베일런트 교수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습니다.

저로서는 힘들고 생소한 일이지만 갑자기 친구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별일 없으면 저하고 식사하시지요."라는 말을 금년 연말이 가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9.1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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