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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번째 편지 - 또 하나의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 [고전 결박을 풀다]

 

월요일 아침부터 창밖에 비가 내립니다. 오랜만에 기다린 비지만 비는 역시 비입니다.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돕니다. 어제도 하루종일 이런 날씨였습니다.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책상에 앉아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번 정리작업 때 100권의 책만 남겨 모든 책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무슨 책이 있나 보았더니 대부분 고전들입니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변신이야기, 신들의 계보, 아이네이스, 아이에스킬로스의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의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전집, 국가, 철학의 위안, 명상록, 역사, 펠로포네소스 전쟁사, 연대기, 의무론, 키로파에디아, 크세노폰 소작품집, 신곡, 궁정론, 수상록, 군주론 등등입니다. 나머지 책들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 해설서들입니다.

고전에 취미를 붙인 것입니다. 아마도 고전에 취미를 붙일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문제는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초, 중학교에서 대한자유교양협회가 지정한 <자유교양도서>를 강제로 읽게 하고 자유교양 대회에 나갈 학생들을 선발한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때 처음으로 고전이라는 것을 접하였습니다. 강제는 반발을 낳아 고전하면 지겨운 것이라는 관념이 그때부터 형성되었습니다.

1977년 대학교 1학년 때 어느 출판사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상 전집 100권짜리를 샀습니다. 물론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어머님 댁에 가면 한두 권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그 전집 덕분에 <촛불의 미학>, <황금가지> 등의 책 제목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오십몇 년을 고전과는 담을 쌓고 살던 제가 고전에 입문하게 된 것은 강신장 모네상스 대표와 김상근 연세대 교수 덕분입니다. 강대표가 작년 6월 초 몇몇이 모여 고전을 공부하자고 할 때 '이번 기회가 아니면 고전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는 마음에 선뜻 손을 들고 김상근 교수의 지도하에 고전 14권을 공부하였습니다. 90분 남짓 강의에 고전 한두 권을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교수님의 책 내용 설명을 좇아가다가 중요 대목에 이르러 그 책의 핵심 되는 구절을 원문 그대로 읽으면 마치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느낌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때 배운 실력으로 월요편지에서 몇 번 치기 어린 지적과시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김 교수는 이런식의 고전 공부를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고전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압니다. 그러나 그 고전을 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교양으로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스승들은 많은 사람이 이 고전을 읽고 교훈을 배워 멋진 인생을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전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하였습니다.

우선 고전을 목록화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고전 중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목록에 있는 책만 읽으면 된다는 식으로 대중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고전이 한도 끝도 없이 많으면 평생 다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먹게 되니까요.

맨 처음 목록화는 <군주의 거울>입니다. 김상근 교수는 자신의 책 <군주의 거울>에서 기원후 8세기 카롤링거 왕가의 왕자용 리더십 교육 교재 목록으로 군주의 거울이 만들어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전 100선은 1929년 시카고 대학교의 로버트 허친슨 총장이 선정한 것입니다. 허친슨 총장은 고전 100권을 읽지 않은 학생은 졸업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고전을 시각화(비주얼라이제이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로부터 배운 지식은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입니다. 구스타프 도레는 1832년에 태어나 1883년에 죽은 프랑스의 삽화가입니다. 도레는 그리스신화, 성경, 신곡, 돈키호테 등 수많은 고전의 중요 장면을 삽화로 그려냈습니다. 평생 1만 점의 삽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집에 걸어두고 싶어 했습니다. 비록 그 책은 못 읽지만 그 책의 중요 장면을 통해 그 교훈을 자신도 새기고 자녀에게도 가르치고 싶었겠지요.

이 시각화는 다양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그리스 신화와 성경에 대한 그림은 바로 고전을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어린이용 그림책, 드라마, 영화, 게임, 다이제스트 강의 등등이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고전의 교훈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의 일환입니다. 김상근 교수님의 강의도 그중 하나이지요.

또한 강신장 대표는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의 일환으로 수년 전부터 고전을 5분짜리 동영상의 만드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모든 고전을 단 5분으로 요약하여 그 핵심만 동영상으로 만든 <고전5미닛>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재는 고전과 명화까지 하여 약 500편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수고는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의 한 획을 그을 것입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해낸 것입니다. 구스타르 도레의 삽화 작업에 버금가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저는 고전5미닛의 광팬입니다. 김상근 교수의 강의, 강신장의 고전5미닛을 듣고 어느 고전을 읽을 것인지 결정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년부터 고전을 원본으로 읽고 있습니다. 물론 번역본을 읽지만 때론 번역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서툰 영어 실력으로 영어 번역본을 읽기도 합니다. 고전 읽기는 누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부터 시작합니다. 누군가 법으로 고전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부터 시작한다고 정해 둔 것처럼 모든 고전 목록의 첫 번째는 <일리아드>, 두 번째는 <오딧세이아>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일리아드가 너무 어려워 모두 일리아드 읽기라는 거대한 장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고 추락하고 맙니다. 일리아드 장벽을 정복한 사람에게 오딧세이아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저도 일리아드는 3개월이나 걸렸지만 오딧세이아는 보름 밖에 안 걸렸습니다. 일리아드를 읽으며 여러 번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왜 그렇게 신과 영웅의 이름이 많은지, 그리고 지리한 전투 장면 설명은 왜 그렇게 많은지 이것이 사람들을 고전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 공식을 깨주어야 합니다.

강신장 대표가 이번에 과감하게 그 공식을 깼습니다. 그는 고전5미닛 영상 500편 중 30편의 영상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고전5미닛 영상의 스크립트를 그대로 책으로 옮기면서 책의 이점과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살린 것입니다. 보는 동영상의 이점을 살려 책도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책을 통한 또 다른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그가 그 책에서 첫 번째 고전으로 예상과는 달리 <일리아드>를 먼저 소개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노인과 바다>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일리아드>의 높은 장벽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 <노인과 바다>의 묘미를 소개하여 고전이 결코, 두껍고 어렵고 두렵기만 한 책이 아님을 알려 주고 싶었나 봅니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낚싯바늘에 18척 크기의 청새치가 걸려들었습니다. 청새치를 사투 끝에 잡아 뱃전에 매달고 돌아올 때 상어떼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때 산티아고는 소리칩니다. "인간은 패배당하도록 창조된 것게 아니야. 파멸당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강신장 대표의 책에 소개된 첫 번째 고전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매듭을 짓습니다. 노인은 오늘도 거친 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젓는다. "누가 알겠어? 오늘 운이 다가올지는. 하루하루가 모두 새로운 날이 아닌가!"

저는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모두가 쉽게 고전의 바다에 빠질 수 있다는 예감을 하였습니다. 강대표는 책 제목을 고전의 두꺼움, 어려움, 두려움을 푼다는 의미에서 <고전 결박을 풀다>로 정하였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인류의 스승들은 <군주의 거울>을 통해 고전의 목록화를 한 이래 대중에게 고전을 읽히기 위해 여러 가지 <고전 비주얼라이제이션>을 하였습니다. 그 목표는 고전을 각종의 결박에서 풀어내어 대중과 만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고전의 결박을 언제 푸실 건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7.3.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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