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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째 편지 - 에르(Er)의 이야기

 

오늘 저는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유명한 책의 한 대목을 편견 없이 소개하려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도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글의 내용에 대한 책임은 제가 아닌 그분이 지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저자가 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설이 기냐고요. 글 내용이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내(주인공)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에르(Er)의 이야기일세. 에르는 전사(戰死)한 적이 있는데 12일째 되살아나서 저승에서 본 것들을 들려주었네. 에르의 혼은 다른 많은 혼들과 함께 길을 떠나 어떤 불가사의한 장소에 도착했대. 그곳에는 땅에 구멍이 두 개가 나란히 나있고, 그 맞은 편 하늘 쪽에도 다른 구멍이 두 개가 나 있었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재판관들이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판결을 내린 뒤 올바른 자에게는 판결 내용을 나타내는 표지를 앞에 달고 하늘로 통하는 길로 올라가도록 명령하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표지를 등 뒤에 달고 땅 아래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대. 한데 에르가 재판관들 앞에 나타나자, 그는 저승 일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사자가 되어야 하는 만큼 저승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보라고 이르더래.

그(에르)는 혼들이 재판받은 다음 하늘 쪽 구멍 하나와 땅 쪽 구멍 하나를 통해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나머지 두 구멍 가운데 땅 쪽 구멍에서는 때와 먼지에 찌든 혼들이 올라오고, 하늘 쪽 구멍에서는 정결한 혼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더래. 도착한 혼들은 이 초원에 도착한 것을 몹시 기뻐하며 서로 아는 혼들끼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쪽에서는 천 년이나 걸린 지하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겪었는지를 회상하고는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고, 하늘 쪽에서 내려온 혼들은 그곳에서 누린 행복과 아름다운 광경을 이야기하더래."

여기까지 읽으시고 어느 책에 적힌 내용인지 알 수 있나요. 플라톤의 [국가(Politeia)] 마지막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이 에르의 이야기를 전하는 분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친형 글라우콘에게 에르의 이야기를 빌어 사후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후에는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고 누구는 지하세계로 누구는 천상세계로 간다고 하는 사고는 그리스인들에게 일반화된 사고였습니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 오디세우스, 아이네이아스 등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은 모두 지하세계에 가서 죽은 자들을 만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설을 믿었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불멸설을 체계화하여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의 설명입니다. 아무튼 에르의 이야기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즉, 죽음은 단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일 뿐이고,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은 계속 존속한다는 이론)의 실제 모습을 접하게 되어 신기하였습니다.

다시 에르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각 집단(하늘에서 온 집단과 지하에서 온 집단)은 초원에서 8일째 되는 날 다시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길을 떠난 지 4일째 되는 날 어떤 곳에 도착했대. 그곳에 도착한 혼들에게 어떤 대변자가 나와 제비와 삶의 견본을 가져오더니 높은 단위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하더래. '하루살이 혼들이여, 죽게 마련인 족속의 죽음을 가져다줄 또 다른 주기가 시작된다. 첫 번째 제비를 뽑은 자가 먼저 삶을 선택하라. 일단 선택하면 그는 반드시 그 삶과 함께해야 한다. 책임은 선택한 자에게 있고 신은 아무 책임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대변자는 제비들을 그들 모두를 향해 던졌는데, 모두들 자기 옆에 떨어진 제비를 집더래. 제비를 집은 자들은 자기 순번을 알게 되었대.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대변자가 그들 앞 땅바닥에 삶의 견본을 갖다 놓았는데, 그 수는 그곳에 있는 혼들보다 훨씬 많더래. 견본들은 여러 가지였는데 동물의 삶은 물론이고 인간의 삶도 없는 것이 없더래. 그중에는 참주(그리스 폴리스의 지배자)들의 삶도 있었는데, 평생 계속되는 것들도 있고, 도중에 망해서 가난과 추방과 거지 신세로 끝나는 것들도 있더래. 명망가의 삶도 있었는데, 더러는 잘생긴 외모나 강한 체력이나 경기로 유명해진 자들의 삶이고, 더러는 가문이나 선조들의 미덕으로 유명해진 자들의 삶이더래. 삶들은 섞여 있었는데, 부와 가난이 섞인 것도 있고 질병과 건강이 섞인 것도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적당량 가진 것들도 더러 있더래.

여보게 글라우콘, 인간에게는 모든 운명이 바로 이 순간에 달려 있는 것 같네. 우리는 혼을 더 불의하게 만드는 쪽으로 인도하는 삶을 더 악한 삶이라 부르고 혼을 더 올바르게 만드는 쪽으로 인도하는 삶을 더 선한 삶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네.

대변자는 이렇게 말하더래. '마지막 제비를 뽑은 자라도 현명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살아간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바람직한 삶이 마련되어 있다. 맨 먼저 선택하는 자는 방심하지 말고, 맨 마지막에 선택하는 자는 낙심하지 말지어다.' 대변자가 그렇게 말하자 맨 먼저 선택하는 자가 가장 큰 참주의 삶을 선택하더래. 그는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선택했고, 그래서 다른 불행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대. 그는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가슴을 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더래. 그는 하늘 쪽에서 온 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대체로 하늘 쪽에서 온 자들 가운데 적잖은 자들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들은 고난을 통해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반면 지하에서 온 자들은 대부분 자신들도 고통을 받고 남들이 고통을 받는 것도 보아왔기에 섣불리 선택하지 않더래.

모든 혼들은 삶의 선택을 마치고 제비를 뽑은 순서대로 운명의 여신 앞에 가서 자신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더래. 그 혼들은 절차를 마치고 망각의 들판으로 나왔는데 저녁이 되자 무념의 강가에서 야영을 했대. 각자는 이 강물을 일정량 만큼 마셔야 했대. 그리고 그 물을 마신 자는 누구나 모든 일을 잊어버렸대.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밤중이 되자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더니 별안간 각자가 태어나기 위해 유성처럼 사방으로 날려가더래. 에르 자신은 강물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른 아침에 갑자기 눈을 떠보니 자기가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누워 있더래.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혼이 불멸하며 어떤 악도 어떤 선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끊임없이 향상의 길을 나아가며 가능한 방법을 다해 지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네."

어디서 드문드문 듣던 이야기들이 종합되어 있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서구의 문화는 이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진실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허구이겠지요. 그러나 서구 사람들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고에 터 잡아 문화를 구축하였습니다.

[영혼은 불멸한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다. 영혼은 죽어서 심판을 받아 지하나 천상의 세계로 가서 산다. 그리고 다시 윤회하기 위해 일정 기간 후 어느 곳에 모인다.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 삶을 통해 자신의 혼이 향상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 삶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성장하여야 한다. 부자의 삶인지 거지의 삶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겉 껍데기일 뿐이다. 본질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삶을 통해 영혼이 얼마나 성장하느냐이다. 영혼이 완벽한 성장을 하면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즉, 삶의 목표, 인생의 목표는 영혼의 성장이다.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인격을 갈고닦아야 한다.]

저는 에르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논리를 읽어 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인생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낍니다. 저는 어떤 삶을 선택하였을까요? 그 삶을 통해 영혼을 얼마나 성장시키고 싶은 것일까요? 오늘도 욕망에 사로잡혀 영혼의 성장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 이번 주 월요편지 주제로 에르의 이야기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제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 교리에는 윤회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에르의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이 에르의 이야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너 자신'이 혹시 '네가 선택한 삶'이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 말을 달리 해석하면 이런 말이 아닐까요? "네가 선택한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라.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What is life? Who am I? How to live?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에르의 이야기에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셨나요. 그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가실 것인가요.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선택이 죽은 후 윤회하기 직전에만 벌어지는 일일까요. 현재 우리의 일상에도 자주 벌어지는 것 아닐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 직장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할 때, 은퇴 후 어떤 삶을 살까 선택할 때 등등 우리는 모두 윤회 직전의 선택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좀 전에 읽었던 에르의 이야기의 한 대목이 깊은 성찰을 줄 것입니다.

'천상에서 온 영혼들은 단련 없이 너무 편하게만 산 탓에 무지와 탐욕을 쫓아 나중에 후회할 삶을 선택하였으나, 지하에서 온 영혼들은 오랫동안 고난을 받았기에 후회하지 않을 삶을 신중하게 선택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5.3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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