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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편지 - 작은 배역은 없습니다. 작은 배우가 있을 뿐입니다.

          작은 배역은 없습니다. 작은 배우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김윤진이라는 여배우를 아시나요. 쉬리를 비롯한 많은 국내영화에 출연하여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던 2003년, 그녀는 돌연 미국행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서른. 그녀는 오디션에 통과하고 미국 ABC방송과 드라마 Lost 출연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대본을 받아든 그녀는 자신이 맡은 배역이 너무 초라하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한국 팬들이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이럴 거면 한국에 있지 왜 미국에 왔냐고 비난하지 않을까. Lost 촬영을 앞둔 어느 날, 그녀는 자신 보다 먼저 허리우드에 진출한 배우 박중훈에게 전화를 걸어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뜻밖의 조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윤진아. 작은 배역은 없어. 작은 배우가 있을 뿐이야.” 그 한마디에 지금껏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있던 자신을 돌아보고 놀랐습니다. 이제 배역 하나를 맡고 시작하였을 뿐인데 자신까지 하찮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나 스스로 작은 배우가 되었구나.” 그 이후 김윤진은 스스로 ‘연습이 피부에 스며들 정도’로 지독한 연습벌레가 되어 애초 단역에 불과하던 자신의 배역을 주목받는 배역으로 끌어 올렸고 금년 5월에 끝난 Lost 시즌 5에까지 계속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맡은 배역은 다르지만 소중합니다. 그것을 큰 배역으로 만드느냐 작은 배역으로 만드느냐는 배우에 달린 것입니다. 그 배역을 작은 배역으로 만드는 것은 스스로 작은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007 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았던 숀 코네리는 노년에 여러 작품에 잠깐 씩 출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배역은 비록 단역이라도 그는 여전히 대 배우였고 그로 인해 그 배역이 빛이 났습니다.

  검찰에도 여러 보직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큰 배역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검사장만 중요한 역할이 아닙니다. 주임 한사람이 맡고 있는 자리도 중요한 배역입니다. 문제는 그 맡은 사람이 그 자리를 얼마나 열심히 소화하여 연기하느냐에 따라 그 배역이 중요해지기도 돋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농담 삼아 이런 질문을 자주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형조판서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형조판서가 누구입니까. 요새로 하면 법무부장관입니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던지면 뚜렷하게 떠오르는 형조판서가 없습니다. 즉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법무부장관 격인 형조판서는 중요한 배역이었을지는 몰라도 대 배우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글씨를 잘 쓴 한석봉이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배역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배역을 맡아 일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느 배역을 맡느냐에 관계없이 멋진 연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바다거북은 바닷속에서 생활하지만 알을 낳을 때는 육지로 올라오는 습성이 있습니다. 해변이 어둠에 묻힐 때쯤 어미 거북은 모래 구덩이를 만들고 500개에서 1000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는 구덩이를 모래로 덮고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부화한 수백마리의 새끼거북은 작은 몸으로 어떻게 깊은 모래 구덩이를 탈출해 바다로 갈까요. 학자들이 관찰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새끼 거북들은 조직적으로 서로 도우면서 구덩이를 빠져 나왔습니다. 알에서 먼저 깨어난 새끼들 중 꼭대기에 있는 녀석은 천장을 파고 가운데 있는 녀석들은 벽을 허물고 밑에 있는 녀석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밟아 다지면서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온 것입니다. 학자들은 협력에 따른 탈출 성공률을 확인하고자 구덩이에 알을 개수별로 놓아 보았습니다. 1개씩 묻어 놓았을 때 27%, 2개씩 묻어 놓았을 때 84%, 4개 이상 묻어 놓았을 때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구덩이 속에서 자신만 살기위해 서로를 끌어 내렸다면 벽을 허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네 검찰조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맡은 배역을 멋지게 소화하여야 하지만 서로 협력하여야만 합니다. 새끼 거북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처럼 서로를 도울 때 우리가 맡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09.10.12.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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