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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째 편지 -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 지내시나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 지내시나요.

  백수생활도 어느덧 13일이 되었습니다.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 한 달은 된 느낌입니다. 저는 원래부터 백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점심, 저녁 약속을 하고 그 사이에 간간히 미팅도 하고 어떤 날은 검사생활 때도 잘 하지 않았던 조찬 미팅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관리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헬스클럽을 갑니다. 이것도 검사 때는 해보지 못하던 사치입니다. 며칠 전 헬스클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프론트에서 옷장 번호에 새겨진 고무밴드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무밴드에 열쇠가 달려 있는 형태가 아닌 고무밴드에 적힌 번호의 옷장에 가서 비밀번호 4자리를 누르고 닫은 다음 열 때는 그 비밀번호를 다시 누르는 방식이었습니다. 번호는 362번이었습니다. 옷장에 옷을 넣고 운동하고 돌아와 362번 옷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비밀번호를 눌렀는데도 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분을 불러 마스터 키로 열어보았더니 빈 라커였습니다. 제가 362번 옷장에 옷을 넣지 않고 다른 번호 옷장에 넣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느 옷장에 넣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옷장은 무려 500개나 되는데 하나하나 다 열어볼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0-40개의 옷장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은근히 당황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딱히 방법도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약 30분 쯤 지났을 무렵 혹시 362번을 잘못하여 326번에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326번 옷장에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습니다. 오 마이 갓!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362번 옷장 번호를 받고 옷은 326번에 넣은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건망증이 생겨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화를 걸려는데 사람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대화를 하는데 어떤 사물의 명칭이 생각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 하여 서글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잊어버린다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할까요.

  저는 지난 8월2일 퇴임식을 한 후 현관에서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혹시 내일 습관적으로 출근하더라도 박대하지 말아 주세요.’ 퇴임하면서 가장 걱정하였던 것은 매일 점심을 먹고 걸었던 법무연수원내 법화산 산책로가 간절히 생각나 달려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등산로를 덮고 있는 낙엽, 짙은 녹색의 나무 잎사귀, 후두둑하고 날아가는 이름 모를 산새, 시원한 나무 그늘 등 이 모든 것이 그리워질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망각의 힘은 너무도 위대하고 강하였습니다. 지난 13일간 한 번도 법무연수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너무할 정도로 정말 깡그리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어쩌면 제가 법무연수원장을 하였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 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바쁘게 스케줄을 잡은 탓도 있지만 망각이 힘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저는 속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법무연수원의 추억에 사로잡혀 계속 과거를 그리워한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엘버트 후드는 ‘아름다운 추억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잊을 수 있는 능력은 위대성의 진짜 상징이다.’라고 잊을 수 있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고, 노만 필은 ‘어제는 어제 밤에 끝났다. 오늘은 새로운 시작이다. 잊는 기술을 배워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잊는 기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쇼렘아쉬는 ‘기억해 내는 힘이 아닌 잊는 힘이야말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것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법무연수원 시절을 잊고 지내는 요즘의 제 모습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잊어버리기만 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도 하게 됩니다.

  며칠 전 김한수 법무연수원 기획과장과 통화를 하면서 정말 놀랍게도 법무연수원이 생각나지 않더라고 말하였더니 김과장이 ‘법무연수원의 시설은 잊어버리시더라도 같이 근무한 저희들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해 제가 한 순간 멍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한 부하들을 잊고 지냈다고 생각하니 제 스스로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 마르티얼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기억과 망각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다 잊어버리더라도 저의 마음판에 새겨놓은 법무연수원 가족들의 헌신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버리시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8.15.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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