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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번째 편지 - 진정 사랑한 이와의 이별은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진정 사랑한 이와의 이별은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어제 저녁 부엌에서 일하던 아내가 저를 불렀습니다. 냉동실 문이 아무리해도 닫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안 해보던 일이지만 딱히 저 말고 달리 할 사람도 없어 냉동실 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냉동실 서랍이 약간 튀어 나와 잘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까지 10분이 걸렸습니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은 너무 쉬워 보였습니다. 각 서랍을 빼 놓고 보니 성에가 너무 심하게 끼어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에는 매우 두껍게 서려있어 손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늘 하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망치와 드라이버를 연장함에서 꺼내 들고 그 성에를 깨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살살 깨다가 탄력이 붙어 드라이버를 성에에 대고 망치로 깊게 홈을 파서 덩어리 성에를 떼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소에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집안 일에 약간의 재미도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일을 즐기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망치로 두드린 드라이버가 무엇엔가 닿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스 새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갑자기 당황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살펴보니 드라이버로 작은 파이프에 구멍을 낸 것 같았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드디어 어설프게 일을 하다가 사고를 친 것입니다. 상식을 동원해 생각해보니 액화가스가 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여들었고 딸아이에게 인터넷 검색을 해보라고 하였더니 금방 해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전직 전자기기 수리기술자입니다. 냉장고 성에 제거시 남자 분들이 드라이버 등으로 제거하시다가 질문하신 분 같은 사고를 정말 많이 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새 것으로 교체하여야 합니다. 수리가 가능하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크고 추후 재불량 가능성이 매우 높아 냉장고를 폐기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정말 제대로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아내는 그래도 위로를 해줍니다. “10년 전 이사 올 때 빌트인 되어 있던 냉장고인데 자주 성에가 끼어 바꿀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잘되었네요.” 위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니 한심하였습니다. 평소에 안하던 가사 일을 처음 하다가 냉장고를 폐기처분하는 대형사고를 친 것입니다.

  28년을 검사로 살아오면서 늘 익숙한 일만 하고 살아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별 것도 아닌 냉동실 성에제거 작업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실수를 하고 보니 앞으로 검찰을 떠나 시작하게 되는 새로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사고를 치게 될지 걱정이 앞섭니다. 다들 아무런 걱정 할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익숙한 일과 헤어져야 하는 두려움은 새로운 일을 하게 되는 설레임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혹시 ‘익숙함과의 결별’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작가 구본형을 아십니까. IBM에서 잘 나가고 있던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놓았는가.’라는 상실감에 휩싸여 한 달간 고민한 끝에 다섯 가지 행동지침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였습니다. 좋아하는 일이 진짜 열정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했고 직장업무를 발전시켜 ‘변화연구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둘째는 ‘내가 잘하는 걸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는 것, 그가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것을 어떻게 생업과 연결할 것인가’, 24시간인 하루를 ‘나에겐 22시간뿐’이라고 시간개념 자체를 바꾸는 것, 그리고 ‘변화경영전문가’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자신의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8년 그의 나이 43살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독립합니다.

  저도 이제 익숙한 것과 결별할 시간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구본형님의 변화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행동지침은 무엇이 될까요. 평소에 늘 월요편지를 통해 이런 일에 익숙해지도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다짐하기 위해 글로 쓰기도 하였지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이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을 제외한 저의 전 인생을 같이한 검찰과의 사랑은 모진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이 모질어 이별이 처절해 지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 사랑한 이와의 이별은 늘 그러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남은 기간 동안 매일매일 이별연습을 하렵니다. 이별이 조금이라도 더 쉬워지도록 말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7.18.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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