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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번째 편지 - 그래, 늙지 말고 익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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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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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회(고교동창 부부모임) 가을여행을 지난 주말 1박 2일로 다녀왔습니다. 매년 봄 가을로 가는 정례적인 여행이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5년 만에 인등산 자락을 다녀왔습니다.

바비큐로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피곤이 밀려올 무렵, 회장인 K 교수가 캠프파이어를 준비했다며 이동하자고 합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캠프파이어라는 단어인가요?

숙소 옆 캠프파이어장에는 이미 굵은 장작들이 뻘겋게 달구어지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한밤중 장작불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려니 우리 모두 20대 대학시절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저는 왼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왼쪽 옆에 앉은 아내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내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자동으로 똑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바로 노래 <연가>입니다. MT 가면 늘 부르던 노래입니다.

왼쪽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한 번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 손바닥을 치고 또 한 번은 자신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의 왼 손바닥을 치는 동작과 함께 부르던 노래입니다. 제 선창에 모두 같은 동작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MT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노래는 가수 윤형주가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만난 여학생을 위해 즉석에서 만들었다는 노래 <라라라>입니다.

노래 제목으로는 무슨 노래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지만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라는 가사를 들으면 모두가 잘 아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모르면 그 당시 유머로 ‘간첩’입니다.

한 친구가 옛 추억을 소환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꼭 수건돌리기를 했지.” 맞습니다. 통기타를 치는 친구가 이 노래를 부르면 남녀 학생들이 바닷가에 둥글게 앉아 합창하며 수건돌리기를 한 추억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그렇게 젊음을 불살랐습니다.

저도 또 하나의 추억을 소환했습니다. “늘 모닥불 앞에서는 모두 촛불을 들고 서서 한 사람씩 소원을 빌거나 자신의 다짐을 말하곤 했지”

이 말을 받아 S 여사가 “오랜만에 근황과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순서를 가지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첫 번째는 Y 친구입니다. 회계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그는 언제 은퇴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2, 3년 내 사무실을 아들에게 잇게 할 계획도 이야기했습니다. 12월에는 둘째 아들네 손주 봐주러 미국에 두어 달 간답니다.

두 번째는 K 친구입니다. 교수하는 그 친구는 65세가 되는 2023년 8월 말 은퇴랍니다. 은퇴 후 다른 곳에 취업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고 싶답니다. 아내는 손주들 보라고 하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는다며 자신의 속마음 계획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J 친구입니다.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입니다. 그는 담담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사무실은 은퇴라는 개념이 없지만 나이가 드니 맡을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수입도 많이 줄었지요. 그러나 반면 스트레스도 거의 없어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족과도 갈등 없이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 친구가 끼어들었습니다. “오늘 보니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 이 말을 J 친구의 아내 S 여사가 받았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다 제가 사랑받게 하기 때문이지요.” 모두 이 한마디에 자지러졌습니다. 나이 들어도 재치는 여전한 S 여사입니다.

다음은 또 다른 K 친구입니다. 교수인 그 친구 정년은 2024년 2월이랍니다. 교수는 학기별로 정년이 정해진다네요. “은퇴하면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직 아내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아 동의해 줄지는 모르지만 꼭 해보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간절히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결혼시키는 둘째 딸 자랑을 은근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위가 소프트뱅크에 근무하고 딸이 하이브 재팬에 근무하여 일본에 가서 산답니다. 우리 자녀들이 미국 일본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 “나는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은퇴라는 개념이 없지만 어머님 별세와 스페인 여행의 영향으로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정말 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일에 매인 삶이 진정한 삶인가, 의문을 품고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한마디 하고 싶답니다. “요즘 정서적으로 가장 편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와 남편이 서로 맞추려고 노력한 덕분에 갈등을 거의 극복하였고 새로운 갈등 요소가 생겨도 쉬이 해소합니다.”

마지막으로 Y 친구입니다. 언론인인 그는 “저는 정년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 직책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후 고문으로 지내게 되지만 정말 이런 순간이 다가왔네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서울대 교수를 하신 유달영 선생님이 국회의장을 하신 김재순 선생님께 어느 행사장에서 상을 수여하시면서 ‘올해 나이가 얼만가요.’라고 물었답니다. ‘일흔입니다.’라고 하자 ‘참 좋은 나이네’라고 하셨답니다. 그때 유달영 선생님은 82세셨습니다. 102세 김형석 교수님께서 ‘살아보니 가장 좋은 때는 65세부터 75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이제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85세까지는 골프 치며 즐겁게 삽시다. 그전에 죽는 친구는 내 손에 죽습니다.” 부관참시가 연상되는 끔찍한 표현이지만 그 진정성만큼은 절절히 느껴집니다.

친구들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은퇴, 자녀 결혼, 건강 등이 주된 화제였습니다. 다들 처한 사정과 생각하는 바는 다르지만 이 모임을 오래도록 하며 친구들 간에 정겹게 살자는데는 모두 한마음이었습니다.

업저버로 참석한 K 교수 큰딸이 아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은 소감을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두물회 모임을 보고 자랐습니다. 저는 두물회가 늘 자랑스럽고 부러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니 저도 훗날 이렇게 나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모닥불은 조금씩 사그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처럼 조금씩 사그라져 가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새로운 장작을 넣어 또다시 불꽃을 활활 피우고 싶은 심정입니다. 문득 저녁 먹으며 들은 노래가 떠오릅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 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에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 마디/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노사연의 <바램>입니다.

저는 모닥불을 끄면서 다짐했습니다.

“그래 늙지 말고 익어가자”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10.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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