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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번째 편지 - 정신없이 살던 때가 그리운 순간

  • 조회 1745
  • 2021.08.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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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요즘 저는 이렇게 인생을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고검장까지 지낸 검찰 후배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 후배가 불쑥 던진 말입니다.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변신한지 몇 년이 되고 보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는데 마음은 여유가 없습니다. 뭔가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딱히 놀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 후배의 말은 제가 요즘 저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저도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매주 월요편지를 쓰면서 인생을 성찰하지만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1시간 반 정도 그 후배와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실한 그 후배 입에서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보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검찰에 있을 때는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건을 반듯하게 처리하는 것이 방향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의 총수가 되어 보는 것이 또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방향은 제가 검찰에 입문할 때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30년간 방향을 두고 고민한 적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였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 달리느냐는 저의 역량에 달린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을 떠나 세상에 나오고 보니 방향이 여러갈 래였습니다. 변호사라는 큰 갈래가 있기는 하지만 변호사 이외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1년 검찰을 떠난 이후 10년간 변호사와 기업인으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변호사 일은 많이 줄어들었고 기업인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과연 이 선택은 최선이었을까 더러 고민하기도 합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까? 이런 고민을 하니 앞으로 10년에 대한 결과도 지금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무거운 생각이 듭니다.

검찰에 근무할 때는 방향을 고민한 적이 없지만 지금은 매일매일 방향을 고민합니다. 사업 아이템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유지하여야 하나 아니면 다른 것을 덧붙여야 하나 전혀 다른 그 무엇은 없을까 고민이 깊어집니다.

그 후배도 방향에 대한 고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들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자주 봅니다.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 삶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합니다."

저도 이미 겪었던 고민의 궤적을 따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때는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 자연인 삶을 얼마 동안이나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방향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인생 철학입니다. 즉 인생관입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What is life? 인생은 무엇인가? How to live? 어떻게 살아야 하나?

2500년 된 질문을 저에게 다시 던져봅니다. 이것은 배구 시합에서 감독이 작전타임을 부르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경기를 점검하고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경기를 치를지 서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선택지가 많다 보니 어떤 선택을 하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26일 썼던 월요편지 <선택의 역설>이 생각납니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대안이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고 후회하는 만큼 선택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선택 자체가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옵션이 더 많을수록, 당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기 쉽죠."

그 후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상상 속의 대안이 너무 많은 탓일 거에요. '자연인'도 하나의 대안이지요. 그러나 합리적으로 서너 개의 대안을 놓고 선택하여야 할 거예요.

선택지가 적어야 선택에 대한 만족감이 증가한다는 것이 선택의 역설이에요. 변호사, 사업가, 정치인, 교수 등 현실적으로는 이런 몇 가지 대안밖에 없는데도 상상 속의 대안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선택 후에 우리가 그 선택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몰입이 안 되니까 자꾸 다른 선택지를 기웃거리는 것 같아요. 몰입은 선택지와 무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대학 입시 시절, 사법시험 공부하던 때,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노력한 순간, 검사 생활을 하며 최선을 다해 일한 나날들, 모두 몰입의 시간들입니다. 그때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요.

정신없이 일하던 때는 언제 좀 여유 있게 시간을 마음껏 써볼 수 있는지가 로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을 기웃거립니다. 이런 모순이 있을까요?

인생은 이런 모순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가 지금 몰입할 그 무엇인가가 주어져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면 다시 여유 있는 시간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인생은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요?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여유 있는 삶을 그 자체로 즐기세요. 조만간 여유가 없어질 것이 분명하니까요. 여유가 불만족스러우면 다른 삶의 몰입 거리를 빠른 시간 내에 결정하세요. 그리고 몰입하세요.

저는 몇 년 전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1년간 밥도 절제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은 인생이 왜 이렇게 한가한지를 고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배고프고 힘들어서요."

그 후배는 제 이야기를 다 듣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결국 정신없이 살아야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네요. 사실 정신없이 살 때는 인생에 대해 고민할 새도 없이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참 인생이란 모순 덩어리네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지금 정신없이 살고 계신가요? 그때가 좋은 때입니다. 반대로 여유 있게 살고 계신가요. 그 순간을 만끽하십시오. 조만간 정신 없어질 테니까요.

똑같은 상황을 즐기느냐 불안해하느냐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8.17.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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