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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번째 편지 - 미니멀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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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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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리를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무엇이든 정돈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우리네 삶은 잠시만 한 눈을 팔면 정리정돈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갑니다.

제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사는 서재 겸 옷방은 늘 정리정돈의 힘과 어질러짐의 힘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전쟁터입니다. 지난 주말 책상 앞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니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가로 8칸 세로 8칸 모두 64개 칸에는 책과 잡동사니들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불과 한두 달 전에 정리한 것 같은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책과 전자제품 사기를 좋아하는 제 성품이 빚어낸 걸작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반복되는 상황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서고를 두리번거리다가 언제 샀는지 모를 책 하나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꼭 맞는 책입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버리지 못한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서 나의 삶은 멈추었다. 그때 내가 만난 것은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이었다. 물건을 줄이니 나 자신도 달라졌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미니멀리스트의 주장이 책 구석구석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저자 사시키 후미오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스님의 선방 같은 빈 공간을 자신의 삶 공간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저는 수많은 물건을 바라보면서 저는 그런 경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신 물건을 정리정돈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 번 물건을 정리정돈하였지만 또 잡동사니로 뒤엉키는 이 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정리정돈을 한다는 명분으로 책 2권을 더 샀습니다. 정리정돈을 지속하려면 물건을 무의식적으로 사들이는 생활 습관을 끊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정리정돈을 위해 다시 물건(책 2권)을 사고 말았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와 미니멀리스트 미셜의 [오늘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e-북으로 사서 지난 금요일 부산 가는 출장길에 KTX 안에서 다 읽었습니다.

그 두 책에는 미니멀리스트의 철학보다 각 공간별로 구체적인 정리정돈법이 자세히 적혀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관, 거실, 주방, 서재, 침실, 욕실, 화장실 등 집에 있는 공간별로 어떻게 정리정돈할 것인지 삽화까지 곁들여 잘 설명해 놓고 있었습니다.

곤도 마리에는 물건을 가슴에 품어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 하나가 미국을 곤마리 열풍으로 들끓게 만들었습니다. 곤마리 정리법 열풍을 취재한 어느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라는 이름의 참가자는 정리하기 전 자신의 삶은 한마디로 통제 불능이었다고 고백했다. '저는 행복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죠. 그건 혼란과 무질서예요.'"

저는 마침 약속이 없던 지난 토요일 하루 종일 혼자서 집을 치웠습니다. 책장에서 책을 100여 권 빼냈고 잡동사니도 엄청나게 치웠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당장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은 팩킹하여 아래에 있는 어머님 댁의 창고 방으로 옮겼습니다. 책장을 정리하고는 이번에는 옷장에 도전하였습니다. 아직 겨울옷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옷장은 겨울옷과 봄옷 그리고 여름옷까지 뒤섞여 있었습니다. 먼저 방에 있는 옷장에서 한두 달 동안 입지 않을 겨울옷을 모두 꺼냈습니다. 이 옷들을 아래층 창고 방에 갖다 두고 창고 방에서는 앞으로 입게 될 초여름 옷을 왕창 꺼내다가 방으로 가지고 와 정리정돈을 하였습니다.

제가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타입이니 하루 종일 이 짓을 하지 보통의 남자들은 잘 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수십 년간 하고 지내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재미도 붙였습니다. 제 방에 있는 책장의 책과 잡동사니, 옷장의 옷을 정리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노트북을 켜고 미국 영화를 온라인 서비스해주는 넷플릭스에서 볼 만한 것을 찾다가 다큐멘터리 하나에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미니멀리즘: 비우는 사람들 이야기]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고 정리정돈을 하는 중이라 이런 다큐멘터리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더 새롭고 더 근사한 물건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행복과 물질의 관계를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라는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나니 미니멀리즘이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차원이 아닌 사회변혁의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관심은 여전히 물건 정리법이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333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 여성이 제안한 것인데 3개월 동안 33개의 옷(장신구와 신발 포함)만 입고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녀는 가정주부가 아니라 광고업계에서 일하고 있어 외부고객을 만날 일이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333 프로젝트로 멋지게 자신을 가꾸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옷이 무엇인지, 무엇을 즐겨 사용하고 입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평소 우리가 입는 옷은 서너 벌 밖에 되지 않지요. 신발도 늘 한두 가지만 신지요. 만약 제가 옷과 신발의 개수를 제한한다면 정말 제가 좋아하는 것만 남기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옷의 조합을 생각하여 멋진 조합을 생각해 낼 것입니다. 실제로 그 조합을 입어보고 사진 찍어 두면 옷을 입을 때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옷장에 많은 옷이 있지만 외출할 때마다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대충 입고 집을 나서지요. 옷을 입는 행위가 우리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귀찮은 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어제저녁 교회를 다녀와서 아내에게 이 333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아내가 관심을 보이기에 미니멀리즘 다큐멘터리 전체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333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장 이 밤에 하자고 하였습니다. 밤 11시 무렵 저희 부부는 한밤중에 정리정돈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333 프로젝트를 변형 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가진 물건의 숫자를 제한한다는 데 있지 숫자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저는 정리정돈의 첫 번째로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의 숫자를 100권으로 제한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반면 아내는 옷을 100벌로 제한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속옷, 양말, 스타킹도 100벌 숫자에 포함시킬까요. 아니면 따로 할까요." 벌써 아내는 요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한한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숫자를 정하세요. 그것이 중요해요."

저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책 100권을 골라 책장 가운데 8칸에 집어넣고 나머지 100여 권은 책장 왼쪽 한 줄 8칸에 넣었습니다. 제가 토요일 정리하고 남긴 책이 200여 권 되는데 그 200권을 두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100권과 나머지 100권입니다. 나머지 100권을 일별하니 당분간 손이 가지 않을 책들이었습니다. 좋아하는 100권을 보니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곤도 마리에가 이야기한 설렘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곤도 마리에처럼 한 권 한 권 가슴에 품은 것은 아니지만 100권으로 숫자를 제한하고 그 100권 안에 들어온 책을 보니 가슴에 품었더라면 하나하나 설렐 책들이었습니다. 곤도 마리에 정리법보다 이 숫자제한 보유법이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정리 속도도 말할 수 없이 빨랐습니다. 저는 책장을 정리하고 옷장도 정리하였습니다. 옷 100벌(속옷, 양말 포함)과 장신구 50개(넥타이, 벨트, 목도리, 액세사리 등 포함)를 정리하였습니다. 아내도 오랜만에 정리정돈에 힘을 냅니다. 벌써 2시가 되어 오늘은 이만하기로 하였습니다.

잠자리로 들기 전에 다시 한번 다큐멘터리의 한 대목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 시절에 한 연설의 일부분입니다.

"미국의 진정한 문제점은 에너지 부족, 물가 상승 또는 불경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데 있습니다. 근면 성실, 건강한 가족 그리고 단결된 공동체에 자부심을 느끼던 미국이었지만 지금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소비 지상주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이 더 이상 [하는 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가진 물건]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으로는 목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5.22.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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